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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Watcher  야경꾼 _  전시평론

박우진(Space Ikki)

 

 

밤이란 무엇일까? 밤은 어디에서 올까? 어떻게 밤이 생겨날까? 이 질문의 답으로 밤이 지구의 그림자라는 것을 인간이 알게 된 것은 16세기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에 의해서이다. ‘밤은 지구의 그림자’라는 명제를 얻기 전, 사람들은 밤과 어둠을 인간이 저지른 큰 잘못의 결과로 해석하고, 밤이 오면 밤바람 속의 정령들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에서 어두운 욕망이 고개를 든다고 상상했다. 미지의 밤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총체적 집합소 같은 것이었다. 이제 두려운 밤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밤은 여전히 인간에게 낮과 반대되는, 이성의 반대편 영역을 자극하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쾌락을 중단시킬 뿐인 낮을/ 너희는 기뻐할 수 있겠니?”

“모든 낮엔 골칫거리가 있고/ 밤엔 쾌락이 있어.”

 

이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에 등장하는 필리네(Philine)의 말이다. 그녀는 삶의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한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해 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런 “여성의 시간”으로서의 밤을 더 많이 체험하고 싶어 한다. 밤의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밤의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이제 밤은 “모든 아름다움의 어머니”로서의 시간으로, 미학의 원천이 된다.

오늘날의 밤은 도시는 불빛으로 채워지고 낮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람들의 활동으로 가득하다. 밤의 갈망이 브레이크 없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에게 완벽한 밤이란 외부에서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 두 눈을 감고 수면하는 내부의 시간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도 도시의 불빛으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은하수의 장관에 경탄할 수 있는 장소는 점차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인공의 빛은 밤의 소멸을 이끌고 낮의 영역을 확장한다. 밤이 가지고 있던 쾌락과 사색의 미학은 점차 사라진다. 박미례 작가는 빛이 가득한 도시의 밤이 아닌, 밤 그 자체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수천 년 전 바빌로니아 지역에 살던 셈족계 유목민인 칼데아인들이 가축을 키우고 푸른 초목을 따라 이동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만들었던 것처럼 밤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숭고한 감정에 압도되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작가는 밤하늘의 어둠 그리고 펼쳐지는 환상적 이야기들에 마음을 뺏긴다. 작가는 사슴, 황소, 궁수(弓手), 별 이야기의 합주가 펼쳐지는 밤하늘 중 부엉이 곁에 있다. 밤의 시계가 돌아가는 동안 부엉이는 이 밤 곳곳을 누빈다. 낮이 두려워 밤에 움직이는 부엉이는 밤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어둠을 잠시 경험하는 것은 짜릿한 쾌락을 주지만 그 어둠만 계속되는 곳에서 있어야 한다면, 이제 어둠은 두려움이 가득한 현실이 된다. 그래서 부엉이는 작가와 함께하는 야경 감상자로서 언뜻 떠오르는 밤의 두려움을 제거해주며 현실로 귀환을 안내해 줄 야경꾼이다.

유화와 목탄을 이용한 회화작업을 주로 선보이던 박미례 작가에게 이번 스페이스 이끼에서 선보인 시트지 작업은 새로운 시도였다. 손의 궤적이 느껴지던 작업을 주로 하던 작가가 손길이 잘 표현되지 않는 새로운 매체를 만났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내심 갖고 있었다. 시트지 작업은 기존 회화작업에 비해 감정과 이야기가 정제되기 때문에 밤 이야기 자체를 전달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에는 적합한 소재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대상을 환상의 영역으로 올려놓던 손의 궤적이 사라지면서 작업 전체에 풍기는 환상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업이 시트지 작업의 시작점에 있는 것이라면 차후 작업에서 보일 혼용과 변주에 기대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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