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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속의 동물, 동물 속의 인간

이선영 / 미술평론가

 

목탄으로 그려진 박미례의 동물 드로잉들은 마치 수집된 표본들처럼 다양한 생태와 형태적 특성들이 포착되어 있다. 회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소용돌이치는 원추 형상 및 화려한 색채와 어우러진다. 드로잉에서든 페인팅에서든, 작품의 주인공인 동물들은 평화와 천진스러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격성으로 잔뜩 날이 서있다. 그것은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거한 잔혹함이라기보다는, 동물계의 우세종이 된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가운데 결과 된 다른 종들의 고난과 관련된다. 그들은 대자연이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에 유기되어 있는 듯하다. 그녀의 작품에서 동물들은 인간화 되어 있고, 인간은 동물과 비유되면서 기괴한 본성을 드러낸다. 죽어가는 오징어가 산 오징어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아서 같이 죽음으로 이끌리는 영상 작품은 횟집 수족관이라는 극단적 인공 생태계에서 펼쳐진다. 배경으로 깔린 몽환적인 음악은 두 개체의 밀고 당기는 필사적인 몸짓을 죽음의 춤으로 변화시킨다. 작품 [the octopuses]에서 여러 개의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죽기 살기로 엉켜있는 두 마리의 문어는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계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 상태에서 같은 종끼리의 경쟁과 다툼은 있을 수 있지만,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낳는 투쟁은 이성과 언어, 도구(무기)를 갖춘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파괴의 위험에 대한 자연적 제어장치를 풀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사슴의 뿔이나 날치의 날개지느러미, 새치의 칼 같은 입 등,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감탄할만한 자연의 발명품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자신만의 종적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생존도구가 된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그들의 종적 특성은 자신들을 포박하고 궁지에 빠트린다. 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사슴은 뿔 때문에, 날치는 자신이 품고 있는 풍부한 알 때문에 죽어간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임의의 규칙은 지배적 원리가 되어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대다수의 종들을 주변화 시킨다. 막다른 경계까지 몰린 동물성은 예술작품 속에서 억압되어 있던 타자로 복귀한다. 하얀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어진 선들은 종의 특성을 재현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개체의 상황을 표현하는 자연발생적인 흐름과 중첩된다. 경쟁, 죽음, 짝짓기 같은 다양한 상황 묘사와 대상화된 동물과의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인 힘의 선들이 하얀 배경에 남겨진다.

 

강한 터치와 액션을 배경으로 불안하게 요동치는 회화작품에서 동물들은 박제화 된 장식으로 죽음과 화려함을 교차시킨다. 작품 [10 bouquet of beasts]에서 초식 동물들의 머리들은 꽃다발이 되어 있다. 머리절단, 즉 거세에 상응하는 조치는 환상적 아름다움이 창조되면서 수반되는 공포스러운 제의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것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것, 그 중의 하나인 예술이 창조되는 과정에 투입되어야 할 희생과 헌신과도 관련된다. 박제된 듯 무표정한 동물들은 밝은 색으로 속도감 있게 주변을 쓸어버리는 공간과 자신들을 겨누는 회오리 운동 속에 위치해 있다. 대상을 둘러싼 움직이는 힘들은 그것들을 한 뭉치의 아름다운 사물로 만들어버린 잔혹성을 드러낸다. 사슴 한 쌍의 머리 위에 커다란 꽃이 얹혀 있는(또는 파고드는) 작품 [북극의 연인들]에서 거대한 꽃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흐름은 위협적이다. 소용돌이무늬의 꽃대나 가시들이 뻗친 꽃잎은 욕망과 죽음의 근친관계를 드러낸다. 작품 [정오의 공작]은 폐쇄적 공간 속에 서 있는 공작이 드레스를 입은 듯 우아함을 뽐낸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단조로운 노동에서 벗어나, 정오의 한가로움을 구가하는 공작새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위상을 가진다.

 

30대 초반의 여성작가가 다시 찾은, 작업에 몰두하는 삶은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화면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붉고 푸른 날카로운 선들은 화려한 드레스 자락 같은 깃털을 추풍낙엽처럼 떨어뜨릴 것 같다. 그것은 대상 주변을 공전하면서 언제라도 쐐기처럼 꽂혀 치명상을 입힐 것 같은 위기감을 조성한다. 찬란하지만 취약하기 그지없는 이 존재는 경계까지 몰아붙여진 위태로운 삶의 균형 속에서 탄생하고 소멸하는 예술의 면모를 드러낸다. 박미례의 작품에서 한계에 놓인 것은 예술가로서의 삶 뿐 만 아니라, 자연 그자체이다. 그것은 소수의 특정한 종과 계급이 설정한 편협한 규칙에 의해 도구화, 대상화 되어 버린 타자들이다. 동물로 대변되는, 희생물들의 운명은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강한 파토스에 젖어있는 동물들의 도상은 위기에 대한 격렬한 반응이며, 작가는 오직 그것들에서만 깊은 공감대를 발견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자연 상태는 전쟁(홉스)과 고독(루소)으로 양극화되며, 그것은 공포와 불안을 자아낸다. 가해자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포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깝지만, 위험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은 같다.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대항하여, 인간이 구축해 놓은 상징적 질서도 그 독단성에 의해 위험으로 다가온다.

 

박미례는 도래한 위험 상황을 예측하고 방어기제를 작동하기 위해 환상의 힘을 빌린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환상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은 안락함과 친밀함을 낯설음과 불안, 기괴함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완전히 타자이며 은폐된 암흑세계, 즉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한정된 틀을 벗어나고 언어와 시선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을 도입하는 것이다. 환상은 비의미화의 영역, 즉 죽음이라 불리는 것을 끌어들인다. 공포에 질린, 살아있는 죽음은 기괴하다. 기괴함은 어떤 단일화 된 리얼리티에 대한 모든 재현을 전복한다. 기괴함은 ‘사물들 사이의 틈새에 스며들고,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의 간극을 강력히 주장 한다’(엘렌 식수스) 기괴한 것은 불안의 양식이며, 환상을 그로테스크 예술과 결합시킨다. 환상은 본질적으로 이상주의적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의미를 향한 욕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에 두는 휴머니즘의 전통은 모든 타자성을 단순히 야만적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미례의 작품 속 동물들은 타자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논리로 귀결된 인간중심주의, 그것에 대항하는 환상의 힘을 시연하는 뛰어난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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