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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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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 View _ Passed down from Grand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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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는 인간도 파리처럼 보인다
김노암(전시기획자)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 (a)황제의 재산인 동물 (b)방부 처리된 동물 (c)사육동물 (d)돼지 (e)인어 (f)상상 속의 동물 (g)길거리 개 (h)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미친 것처럼 날뛰는 동물 (j)셀 수 없는 동물 (k)낙타 털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진 동물 (l)기타 (m)막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 (n)멀리서는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근래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람객개발에 열을 올린 미술관들의 노력 덕에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특수를 누렸다. 그 대부분의 동물을 소재로 한 작업들은 팝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친근하였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동물은 가금류거나 펫이나 반려동물이 된다. 물론 죽음을 주제로 한 최근의 작업들을 보면 동물을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동물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을 표현하는 대체물이다.
자연사박물관은 단지 지식과 과학의 전당만은 아니다. 이성이 맹목과 광기와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연사박물관은 사실 박제된 사체들의 전시장이다. 동물의 공동묘지이자 이성의 정신병동인 것이다. 어떻게 이성은 광기와 화해하는가? ‘의미 없음’과 ‘의미 있음’의 관계를 통해서 성스런 동거가 가능해진다. 인간이 인간을 박제하는 세계에서 동물의 박제는 문제거리가 아니다. 보르헤스가 상상으로 작성한 ‘(b)방부 처리된 동물’만이 존속하는 세계에서는 인간을 구성해온 온갖 이야기, 관념, 상상도 모두 박제된 자연사박물관의 세계가 되어 버린다.
사실 ‘자연사(자연의 역사)’란 이상한 말이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역사를 갖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사는 목적을 포함한 인위적 조어이며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자연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인식하고 명명하며 사용하는 동물은 문화에 포함되며 사회-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러니 근대 이후 과학의 이름으로 획득한 성과를 진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을 독과점하면서, 동물을 대상과 의미에 가둬놓음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정복한다. 인류의 영원한 전보를 위해 동물은 대상이 되고 지식이 된다. 사물은 의미가 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인식한다는 행위는 일종의 관계행위이다. 동물과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관계방식을 바꿔왔다. 인간은 동물과 분리됨으로써 동물을 대상화하였다. 대상은 내가 눈을 감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 이해하려면 우선 동물에 얹힌 신비와 공포의 성질을 분리시켜야 한다. 동물을 신격으로 대했던 인간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동물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물은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 목록에 포함되었다. 명명되어 분류 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비와 공포를 정복하고 마침내 인간 스스로의 존재성을 정복하고 마음껏 해부할 수 있게 된다. 신과 동물과 사물과 세계의 모독은 곧 인간 자신의 모독인 것이다.
전근대인들은 식량으로 사냥한 동물을 위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제의적 문화를 만들어왔다. 복합한 신성을 구성함으로써 세상의 평화를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 시설 영적 평화를 위협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서도 안식할 수 없다. 그것이 인류문명이 자초한 영혼의 막다른 골목이다. 방부 처리된 영혼 없는 존재들만이 지상을 배회한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동물들은 마네킹처럼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진짜 동물이 사라진 세계의 인간은 고독하다. 마치 세계의 끝에 이른 기분이다.
박미례의 그림들은 근래 동물화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광기어려 보인다. 칼라와 터치는 날카롭고 신경증적이며 해체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후 마지막 인간이 방문한 자연사박물관처럼 이상한 공포와 예측불허의 불안이 있다. 누군가 동물원의 동물은 슬프다고 했으나 단지 슬프다는 수식만으로는 그녀의 작업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녀의 그림은 어쩌면 의미와 결합된 동물을 그 의미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으로서 그녀의 작업은 의미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선 의미를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와 태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죽죽 그어대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의 전시장을 부정한다. 인간이 정복한 의미의 세계를 부인하고 마침내 인간 자신을 거부한다.
자연사박물관 속 동물에게서, 자연사박물관의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서 다시 신비가 솟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멀리서는 인간도 파리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또한 상상 속의 동물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