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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Random drawing 무작위의 기술, Oil on canvas, 203 x 107cm, 2018 © Parkmi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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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 View _ Passed down from Grand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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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내밀한 변증법
글| 이대범 ․ 미술평론가
태어난다. 그리고 (반드시)죽는다. 시작과 끝을 지시하는 이 단순한 논리적 명제 때문에 대부분의(아니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말할 때 그 두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그러기에 죽음은 항상 나와는 거리가 먼 타인의 문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즉, 죽음은 타인의 문제이고 삶은 나의 문제이다. 이 때문일까. 삶의 과정을 언급함에 있어서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이 같은 의미의 층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리 ‘살아간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해도 간과할 수 없는 결정적 사실은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관계의 파장아래 인간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삶의 영역에 접근 할 것이고, 때로는 죽음의 영역에 접근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지난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유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의 스펙트럼
박미례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상화하는 프리즘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의 과정에서 마주친 소소하면서도 다양한 요소들을 투사시킨다. 인간은 그 모든 것들(동물 식물 사물 등등)에 우선한다. 그렇다고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을 날 수도 없으며, 바다를 건널 수도 없으며, 빠르게 갈 수도 없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이뿐이겠는가. 아마도 수없이 많은 나열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제약된 신체를 지닌 결핍된 존재이다. 그러나 결핍을 인식한 인간은 자신을 목적론적 주체로 상정하여 결핍을 충족시킨다. (물론 욕망충족이 이뤄진 후에는 또 다른 결핍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순환론적 구조가 삶의 동력이다.) 이번 전시에서 박미례는 인간의 능력 밖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결핍을 충족시키는 비행기, 자동차를 등장시킨다. 그것들은 좀 더 편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제조된 것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화면에 자리한 비행기와 자동차는 온전하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다. 분출하는 듯한 빠른 선들은 그것들의 일그러진 형태의 주변을 감싸며 화면을 가득 메운다. 분명 비행기와 자동차는 인간에게 편리, 즉 풍요로움 삶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미례는 그것들을 죽음의 그림자로 채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화려한 색감으로 캔버스를 뒤덮는다(<the airplane> <the automobile>). 이면을 말하고 있지만, 이면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이 쪽, 저 쪽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상호공존 시켜 낯선 시각의 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aquarium>이라는 제목을 가진 바다가 있다. 이 진술은 모순적이지만 정당하다. 우선 화면의 프레임에 포착되는 것은 바다 속 삶이다. 바다에 있어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유영하고 있다. 일견 평화스럽게 보이는 이들의 삶이 깨지는 순간은 프레임의 밖을 인식 할 때이다. 프레임의 밖을 지시해주는 것은 제목이다.
물고기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곳은 정작 <aquarium>이다. 물고기들은 그곳에서 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언젠가는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죽음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죽은 것인가, 살아 있는 것인가. 프레임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새장 속에서 연신 같은 말과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는 새들이 있다. 그들이 발화하는 언어는 <hello, I love you>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정스럽게 키스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할 줄 안다, 키스를 한다는 것은 누구의 관점인가. 그곳에는 구관조의 시선이 들어갈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신이 내뱉고 있는 기표의 뜻을 모르고 있을 것이며, 우리의 눈에 다정스러워 보이는 행위가 어쩌면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오직 인간의 시선만이 투사되어 있다. 그들은 ‘새’이지만, 날 수도 없으며 갇혀 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새’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히 말을 하고 키스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만이 존재 할 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 순간을 통한 발화
박미례는 익숙하거나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채집한다. 그리고 그것을 작업으로 끌어들이면서 ‘삶과 죽음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삶과 죽음’이 의미적 층위에서 동질하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타인(심지어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더)의 경우에는 그들의 죽음을 주관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순간을 박미례는 포착한다. <aquarium>에서 생과 사의 아이러니를, <hello, I love you>에서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이 자신을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의 욕망만을 투사한 채 살아가는 새를 통해 사회에 내재된 폭력적 권력관계를, <the airplane> <the automobile>에서는 ‘편리’라는 한 쪽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면을 제시하면서 그것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들은 삶과 죽음, 또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미지들이 채집될 것이며, 그가 발설하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 질 것이다. 단지 이미지 채집에 있어서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뿐 아니라 삶의 근간을 파헤치는 저인망식 이미지 채집이 필요 할 것이며, 또한 그가 지닌 프리즘이 더욱 촘촘해져 일반론적 층위에서 그치지 않고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