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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의 간곡한 사연을

무작위로

기술(記述)하다

 

이연주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학예사)

 

 

여기, 검은 파도로 시작하여 거대한 구름으로 끝나는 7점의 그림이 있다.

하늘 아래 운집한 세상의 만물이 생과 사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숨과 같은 작은 수증기가 모여 세상을 엎을 힘이 되어 어부들의 배를 삼키고, 각각의 종들은 가지고 있는 본능과 삶의 습성에 따라 - 산란을 위해 몸을 던져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살아남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자기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싸움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무자비하다. 생태계의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는 굴복시킬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멸종되었다고 생각했던 생명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먹이사슬의 굴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오늘을 치열하게 보낸다. 또다시 전쟁과 같은 하루가 저물고 해가 사라진 숲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산은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짐승들은 그 고요에 지친 몸을 숨기지만, 인간은 이 침묵도 참지 못하고 어느새 적막의 밤하늘에 별과 동물의 신화로 빼곡하게 채워놓는다. 그러나 밤의 별보다 가득찬 기묘한 신들의 이야기들보다, 땅 위 생명이 지닌 이 원시적이고 지난 한계까지 뛰어넘어버리는 처절한 생존방식이 오히려 낯설게 응시 되는 순간들이 있다.

 

세상 만물이 ‘괴작’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날카로운 선들이 그림에 자꾸 꽂히는 데

지 몸에 날아드는 화살을 꼽은 채

곪다-새살 돋으며

그냥 살아가기에 마련인 까닭 같다.

삶이건 짐승이건 멍히 바라보면,

짊어진 사연들이 하도 구구절절해 저마다 두꺼운

역사책 한 권씩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

다들 사는 게 용 하다.

 

박미례 [괴작] 中

 

살아있는 것들이 지닌 기괴스러울 정도로 냉혹한 사연들을 기술하는 박미례의 신작 「무작위의 기술」은 생채기 내는듯한 날카로운 붓질과 겹겹이 쌓이는 드로잉 선들로 약 6개월의 시간 동안 목격하거나 경험한 상황들을 캔버스 위에 기록한다. 작업을 시작하면 외부와 차단하고 각인된 순간의 에너지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박미례는,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대자연의 시스템 아래 각자가 가진 사연을 작업의 동기로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들을 인위적인 연출이 아닌, 그 순간에 몰입하여 즉흥적으로 표현한다.

 

박물관에 박제된 짐승들, 지붕 위에 말라붙어 죽은 고양이

앞서 말했듯이 작가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대자연이라는 절대적 시스템 아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숙명적으로 지닌 생과 사의 기괴한 아이러니를 직접 마주했을 때다. 그의 초기 드로잉 작업인 <The rule, 2013-2010> 시리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불완전한 삶에 맞춰 진화되었거나 기형의 형태로 그려지거나, <박제된 짐승, 2014>에서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보았던 박제된 짐승이 마치 죽어있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연출된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상황을 부각시킨다.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외할아버지의 삶을 그린 <바닷가 할아버지로부터, 2016>와 <기계는 고물이 되고, 사람은 퇴물이 된다, 2016>의 영상작품은 그의 삶 주변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치열한 생명의 흔적들을 체감하고 염을 하는 진혼곡과 같다. 따라서 그녀의 진혼곡은 이 땅의 생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에게 들려주는 위로이자 안식과 같다. 이는 그의 시선이 언뜻 먹이사슬로 엉켜있는 생존의 법칙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약육강식의 구조를 지배하는 인간의 상관관계를 꿰뚫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가지는 대상에 대한 연민, 즉 먹이사슬의 가장 우위에 군림한 종으로서의 관찰이기도 하다.

 

침묵이라는 기술이 생긴, 무작위의 드로잉

이전의 작업이 도시의 야경처럼 많은 시퀀스들이 한 화면 안에 가득 넘치게 연출했다면, 이번「무작위의 기술」에서 박미례는 어느 때보다 말을 아끼고, 붓질은 묵직해진다. 불안정해 보일 정도로 세로로 긴 비율의 7개의 캔버스에는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옴니버스식으로 나열된다. 화면 속의 화자가 작가 본인이라는 것 외에 각각 독립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어 산만해질 수 있는 이 이야기들을 입을 떼기 전 숨을 한 번 삼키듯 최대한 생략하며 묘사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이는 작가와 나눈 대화를 통해 처해있는 환경이 달라진 것이 영향이 적잖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도시에서 떨어진 외지에 작업실을 구한 이후 자신이 그동안 겪은 환경과는 온전히 달랐다고 말한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도시에서 바라본 생명에 대한 시선과 야생의 자연 일부로 들어간 상태에서 체감한 생명의 삶과 죽음은 작가에게 어떻게 닿았을까. 그동안 도시의 삶 속에서 생의 연민을 그린 그가 생의 한가운데 두 발로 직접 들어갔을 때, 그것은 밤이 없는 환한 도시와 달리 생각보다 까맣고 깊은 암흑이었을 것이다. 작업실 베란다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화려한 불빛이 빛나는 도심의 풍경이 아닌,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산과 계곡, 밤에는 별빛 외 다른 형체는 구분하기 힘든, 그야말로 고요함 속에 들어간 것이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이미지들은 간결해지나 겹겹이 쌓인 이야기의 층위는 더 깊어진다.

작은 물질이 모여 구름이 되고 바다가 되며 이것이 파괴력을 지닌 강력한 존재는 신비로우나 그만큼 섬뜩하다. 야경꾼은 침묵의 밤 위에 별자리를 그리고, 도심 속에 홀연히 나타난 산양이 화면 안에 들어와 절벽 위에 애처롭게 서 있기도 하며, 뿔 달린 초식동물이 자기 영역을 지키려 경쟁하는 순간이, 서로 지지 않는 듯 화려하게 피어오른 꽃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의 처절한 몸부림과 삶의 의지를 인간의 관점에서 내려다보았던 작가의 동정 어린 시선과 태도는 자연 속의 하나의 개체 중 일부가 되어 세상을 올려다본다. 이를 바라본 관람자 또한, 각각의 그림의 사연을 다 알지 못해도 그림과 그림 사이 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히거나 감정을 이입하게 될 것이다.

 

굴레에 벗어나려 했으나 제자리를 계속 맴돌았구나.

박미례의 7점의 회화에서 눈을 돌려, 개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그린「초코」드로잉을 보자. 이 드로잉은 작가의 작업실 앞에 묶여있는 검은 개의 얼굴이다. 이 개는 건물주가 데리고 와서 건물 앞에 묶어놓고 산책도 제대로 된 밥도 주지 않은 채 묶어놓은 개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하고 땡볕 아래 묶여있는 이 검은 개에게 작가는‘초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간간이 음식을 챙겨준다.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김기택, 「직선과 원」中

 

이 짐승을 돌보면서 작가는 김기택의 시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연민을 그린다. 필자는 이 드로잉의 사연을 들으면서 얼마 전 이슈화된 퓨마 사건이 뇌리에 스쳤다.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탈출하여 비상이 걸렸고, 시는 퓨마가 시민들에게 외출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퓨마가 처음 발견된 곳은 동물원 내 배수지 인근에 웅크려 있었다고. 결국 퓨마는 동물원 내 건초 보관소 인근에서 발견돼 사살되었다. 인근 산으로 갔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생을 동물원에서 보낸 이 짐승은 사살되기 직전까지 유령처럼 그 자리에 맴돌고 있었다. 동물권(animal rights)을 침해하고 대상으로 만드는 동물원이 멸종위기의 동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모순된 상황과 같이 살아온 환경이 달랐던 이 짐승에게 가장 안전하다고 길들여진 곳은 자신을 가둔 장소였다. 인간 또한 스스로 문명 제도와 규범을 비판하면서도 그 굴레의 편리성에 갇혀있듯이. 단순히‘잔인하다’라고 규정짓기에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은 모순으로 가득 찼다. 퓨마가 살기 위에 동물원의 울타리를 넘어 좀 더 멀리 달렸다면, 초코가 목줄을 끊고 주인을 깨물고 산속으로 도망갔다면- 이런 결론은 인간의 잣대로 상상하는 꿈같은 이야기일까. 다시 그의 작업을 보았다. 세로로 긴 형태의 캔버스를 사용한 이유는 작업실의 환경에 맞게 그 틀을 맞춘 것이라 한다. 그의 작업조차 환경에 맞게 규격화되거나 혹은 진화하고 있다. 무엇이 더 두려운 일일까. 생물학적 본능과 문명의 긴장 관계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음으로 달려가는 예정된 결말일까. 사실은 굴레에 갇혀 어딘가에 맴돌고 있는 등이 굽은 개는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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